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김대중 자서전 - 김대중 대통령 어린시절, 김대중 대통령의 가치관

음악과 독서

by Great Y 2018. 7. 3. 17:39

본문

 

 

 

자서전은 작가의 가치관이 녹아 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들여다 볼 수 있다.

내가 자서전을 좋아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개개인이 유년시절을 어떻게 보냈는지 알게되는것이 너무나 흥미롭기 때문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관계의 물꼬를 활발히 트려고 하는 지금 이때, 적극적 남북관계의 뿌리가 되는 김대중대통령의 삶이 문득 궁금해졌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판적이게 보는 입장이었을 뿐더러 "김대중"이라는 사람 자체를 맹목적으로 비난해왔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비판적으로 보는것은 엄연한 나의 가치관에 의한 판단이지만 "김대중" 자체를 비난하는것은 옳지 않기에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떠한 삶을 살아왔는지 알고 싶어 졌다. 

 

김대중 자서전 1부

책의 첫머리

 

"무엇 때문에 싸워야 하고,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하는가. 공산군이 물러나면 좌익이, 한국군이 물러나면 우익이 죽어야 했다. 사상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개인과 민족의 행복 위에 사상이 군림해야 한단 말인가. 나는 전쟁을 보았다. 그 후 평생 민족의 화해와 전쟁이 없는 세상을 꿈꾸며 살았다."

 

자서전 첫머리 부터 공감하기 어려웠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양진영이 사상적 마찰로 전쟁이 야기 되었지만 그 개인의 권력욕 또한 전쟁발발에 영향을 주었다.

사상으로 이견이 있어 다투는것은 우리가 생각과 비판을 할 수 있는 인간이기 때문에 당연한것이다.

또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는 인간이기에 싸우지 않고 대화로 풀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인간의 "욕심"이 들어가 버리면 결렬되는것이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김일성을 위시로 북의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을 넘어 남침하였다.

당시 총을 들었던 군인들의 대다수는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몰랐음이 분명하다. 옆에서 동료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사랑하는 가족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복수심으로 물들며 전쟁의 광기가 한반도를 집어 삼켰다.

단순 사상의 다툼 때문만이 아닌 김일성 개인의 욕심이 전쟁을 불러왔다.

무엇 때문에 싸우고 무엇을 위하여 죽어야 했냐고?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내가족을 지키기 위해, 내 이웃을 지키기 위해 우리 조상들은 싸워야 했다고 말하고 싶다. 

김대중 대통령의 가치관인 화해와 전쟁이 없는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심'을 배제해야 하는데 이것은 인간의 '본능'이다.

선사시대인 구석시 시대부터 ~ 현재까지 전쟁이 없는 인류사는 없었다.

전쟁을 정당화하며 전쟁을 주장하는것이 아니다. 전쟁 발발의 가장 원초적인 원인이며 인간의 본능인 '욕심'에 관해서 말하는 것이다.

김대중 대통령의 가치관을 이런 인간의 기본적 본능을 배제한, 말그대로 이상에 가까운 가치관이라 생각하지만 이런 사람들도 있어야 평화에 근접해 질 수 있기에 존중은 한다.

칼든 미친놈을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칼든 미친놈과 대화로 이야기하며 풀려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니까..

 

 

섬마을 소년 (1924~1936년)

김대중 대통령은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하의면 후광리에서 1924년 태어났다.

 

김대중의 아버지 김운식씨에 관해..

 

농사를 지으며 마을의 구장 직을 맡고 있었고 구장 집이라고 하여 조선어 신문[매일신보]가 김대중의 집으로 배달되었다고 한다.

비록 총독부 기관지였지만 신문을 통해 만주사변, 일본 내각 변동, 조선총독부 인사 교체, 국내의 농촌 이야기, 일본과의 교육, 문화 등을 접했다. 어린 김대중이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심이 매우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아버지 김운식씨는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 판소리 실력이 빼어났으며 춤도 능했다. 김대중 대통령이 판소리에 추임새를 넣을 줄 알고 꽹과리, 장구, 북을 치는 흉내랃 낼 수 있음은 순전히 아버지께서 물려주신것이라 한다. 소리를 좋아하셨기에 소년 김대중의 집에는 그 당시 하의도에서 유일하게 유성기가 있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본에 대해서는 조선이 독립국가인데 일본이 침략하여 이꼴이 되었다고 강하게 비판하였고 당시 개화의 기류는 반겼다고 한다.

한번은 단발을 한사코 거부하며 상투를 틀고 있던 마을 사람을 집으로 불러 갑자기 뒤로 돌아가 그 사람의 상투를 싹둑 잘라 버렸다는 일화도 있다. 또한 당시 불온 문서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왕조 계통도를 숨겨 놓았다가 자식들에게 설명을 해 주곤 했다.

김대중대통령의 아버지 김운식씨는 어느 정도 유복한 환경에서 깨어있는 사람이었듯 싶다.

 

김대중 어머니 장수금에 대해

 

김운식의 두번째 처

"우리 대중이가 공부를 곧잘 하니 여기서 썩히지 말고 목포로 갑시다. 장사라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웁시다." 라는 자서전의 내용을 보아서는 교육열이 높고 섬의 청년으로 자랄 수 있도 있었던 김대중의 미래를 바꿔 놓은 혜안을 지녔던것 같다.

김대중 대통령의 태몽은 호랑이를 품에 안고 있는 꿈이었단다.

태어날 당시 엄청난 난산이었고 하의도에는 병원은커녕 산파도 없어서 출산은 아버지가 도왔다고 한다.

그런 진통끝에 세상에 나왔는데 어깨에 탯줄을 감고 있고 아기는 울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았다. 그러자 어머니 장수금이 부엌에가서 갓난아기의 볼기를 때려 보라고 했다. 아버지 김운식씨는 죽은 듯 꼼짝 않고 있는 시퍼런 아기를 부엌으로 안고 들어가 다리를 위로 치켜들고 볼기를 때렸다. 그랬더니 한참 후에 숨이 돌아오며 이내 크게 울었다고 한다.

어머니 장수금씨의 음식 솜씨는 마을 전체가 알아주었고 특히 동치미는 먼 데 사람들도 찾아와 맛을 보고 갔다.

 

소년 김대중의 서당에 대해

소년 김대중은 하의도에 보통학교가 없었기에 일곱살 때부터 서당에 다녔다.

훈장 선생의 이름은 김연, 호는 초암, 그리고 서당 이름은 덕봉산 밑에 있다 하여 덕봉서당이었다.

서당에서 치른 '강'에서 가장 좋은 성적을 받아 장원지를 받았고 부모는 기뻐하며 장원지를 바람벽에 붙여 놓았다.

이때 어머니 장수금씨가 떡과 고기 등 음식을 푸짐하게 장만해서 당신께서 머리에 이고, 머슴에게는 지게로 지게 해서 서당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김대중의 소년시절은 영특했으며 집안에 머슴이 있는것으로 보아 유복했던것으로 보인다.

 

소년 김대중 학교에 가다.

동생의 입학을 구경갔던 차에 4년제로 신설된 하의보통학교에 2학년으로 입학하게 되었다.

 

소년 김대중이 살던 마을

집에서 학교까지는 왕복 3km 정도 거리였고 마을 아이들과 몰려다녔다고 한다.

바닷가는 김대중과 친구들의 놀이터 였다. 여름에는 벌거벗은 채 수영을 하고 갯벌에서 구멍을 파고 낙지를 잡아 산 채로 먹기도 했다.

'소를 몰고 아이들과 함께 야산에 올라 소는 저희끼리 풀을 뜯게 하고 우리끼리 뒹굴며 놀았다. 초여름에는 보리서리, 가을에는 콩서리를 하다 주인에게 들켜 우르르 내빼기도 했다. 갈대밭에서 야생 오리새끼를 잡아 와 어떻게든 길러보려고 애를 썼다.'

소년 김대중은 동물을 무척 좋아했다.

 집소를 뒤따라 가다 뒷발에 채이기도 하고 집에서 키운 개를 동네 아저씨들이 잡아먹었을때는 울고불며 펄쩍펄쩍 뛰었다. 그랬으면서도 나중에는 아저씨들이 건네는 개고기를 받아 먹었던 기억이 난다

내가 김대중 대통령의 자서전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어린시절 평범했던 소년 김대중의 소소한 이야기 들이다.

 

 (1936~1945)

 (목포 공립 상업학교 시절)

소년 김대중 하의도를 떠나다.

보통학교 4학년때 하의도를 떠나 목포로 가족이 이사하게 된다.

그전에 소년 김대중은 혼자 일본에 가서 공부하겠다며 부모님에게 조르기도 했다. '신문 배달을 해서라도 독학을 하겠다고 했지만 어머니는 펄쩍 뛰셨다.' 단식 시위도 했으나 소용없었다 한다.

당시의 김대중은 어린나이지만 배우고자 하는 욕심이 대단했던것 같다.

하의도에서 3시간 가량 물살을 갈라 목포에 도착했다. "'강경호'라는 배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당시 상황은 또렸하다. 항구에 들어섰을 때는 너무나 놀라웠다. 배마다 꽃아 놓은 깃발이 힘차게 펄럭이고 여기저기 뱃고동 소리가 울렸다. 섬 소년의 눈에 비친 목포는 가히 별천지였다."

당시 섬에서 나와 목포를 처음보는 소년 김대중의 설렘이 느껴지는 문구다. 이런 세세한 과거에 대한 묘사가 자서전의 매력이다.

 

중일전쟁이 터졌을때  학교에서 교장선생이 "포악한 장개석을 응징할 때가 왔다"고 열을 올리며 연설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한다.

일본인 선생이라고 해서 한국 학생들을 차별하여 함부로 대하지는 않았다. 착한 아이들은 격려하고 못된 학생에게는 벌을 주었다. 그래도 일본인 교사는 한국인 교사보다 월급을 두 배로 받았다. 한번은 내가 일본인 교사에게 따져 물었다.

"일본 선생님들이 월급을 두배로 받는 것을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 일본서 여기까지 왔는데, 고향 떠나 고생하는데 그런 대우는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런 대우를 안하면 누가 타향에서 근무한단 말인가" 일본인 선생은 매몰차게 화를 내며 답했다.

역사적 생생한 경험담을 읽게 되어 즐거웠고 김대중 대통령이 일제시대를 보냈음새삼 다시 느꼈다.

 

목포공립상업학교 시절 2학년때 담임은 무쿠모토 이사부로 선생이었는데 이 선생을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어 59년만에 도쿄의 한호텔에서 다시 만나기도 했단다. 선생은 은퇴한 외교관으로, 제자는 대통령으로 그렇게 만났다.

두사람의 보자면 인연이란 모르는것 같다..

 

목포 상업학교를 졸엽할 무렵, 일본은 전세가 불리해지자 젊은이들을 전선으로 끌고갔다.

김대중의 아버지는 김대중의 징집을 늦추기 위해 나이를 낮춰 생년월일을 1925년 12월 3일로 바꾸었다. 그렇게 해서 원래 나이로는 징병1기였는데 3기로 징병 시기가 늦춰졌다. 실제로 김대중의 면에서 호적 정정 신청을 낸 사람 중 유일하게 김대중만 받아들여졌다.

 

김대중의 첫부인 차용애

'1944년 여름이었다. 회사 사무실 밖에 나와 서 있는데 어떤 젊은 여자가 양산을 쓰고 지나갔다. 하얀피부에 머리는 단정히 빗어 넘겼으며 하얀 원피스 차림이었다. 그녀는 눈부셨고 얼마나 예쁜지 눈이 번쩍 띄었다. 첫눈에 반해 버린것이다. 목포에서 그렇듯 세련되고 아름다운 여인은 본 적이없다.'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이렇게 누군가를 사랑하며 따라다닌 시절이 있었음을 새삼 느꼈다.

당시 전쟁터로 끌려 갈 수도 있었던 김대중을 차용애의 아버지 차보련은 강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전 대중씨한테 시집 못가면 죽어 버리겠습니다"라고 강하게 말하자 차보련도 승복했다.

반대했을때와는 다르게 막상 사위가 되니 김대중을 지극히 사랑해 주셨다고 한다.

장인 차보련은 전라남도에서 두번짼가 세번째로 큰 인쇄소를 운형하고 있는 재력가였다.

 

김대중 독립을 맞이하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의 중대 발표가 있다고 해서 처갓집에 들러 낡은 라디오 앞에 앉아 있었다. 천황이 떨리는 목소리로 "무조건 항복"을 발표했다. 아내와 나는 만세를 외쳤다. 울다가 웃고 웃다가 울었다. 그리고 밖으로 뛰쳐나와 거리를 내달리며 외쳤다. "조선이 독립된다. 조선이 독립된다"

그리고 장인이 운영하는 인쇄소에서 종이를 가져다 "일본 무조건 항복"이라고 써서 벽에 붙이고 다녔다.

독립을 기뻐했던 김대중의 해방당시 감정을 알 수 있었다.

 

김대중 해방이후(1945-1950)

일본인 사장이 떠나고 운영위원회 위원장으로 선출되어 한동안 경영인으로 회사를 운영했다.

서울의 유력인사가 미 군정청을 움직여 회사의 관리권을 뺏어 버렸다. 김대중은 종업원 대표로 서울로 올라가 담판을 짓고 관리권을 되찾아 왔다.

한편 건국준비위원회 목포 지부에 가담했다. 목포 지부는 처음 이남규 목사를 중심으로 족직했지만 곧 공산주의자들이 점차 조직을 장악해 나갔다. 얼마 후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고 나자 건준은 인민위원회로 바뀌었고, 목포지부도 인민위원회 목포 지부가 되었다. 이남규 목사는 순수한 뜻이 훼손되었다며 조직에서 탈퇴했다. 나는 그래도 남아 있었다. 격문을 쓰고 벽보와 전단지를 제작하거나 신문 발표용 보도문을 작성했다.

1946년 우파의 이승만이 갑자기 남한 단독 임시 정부 수립 가능성을 시사 했다.

김대중은 좌우 합작을 표방하는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신민당은 중국연안에서 돌아온 "독립동맹" 참가자 들이 만든 정당인데 김두봉, 최창익 등이 전면에 참여하고 있었다. 독립동맹은 평양에 본부를 두고 주로 북에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1946년 2월 '조선신민당'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어느날, 당원들과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을 우리 조국이라고, 적기를 우리 국기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렸다. 그러나 나는 그걸 믿지 않았다. 그래서 거리낌 없이 호통을 쳤다. "어떤 놈들이든 소련을 조국이라고 하고, 붉은 깃발을 우리 깃발이라고 하는 놈은 때려죽여야 한다." 그랬더니 공산주의 성향의 당원들은 "해방의 은인한테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거품을 물었다.

"은인은 은인이고, 민족은 민족이지 않은가. 그렇게 말한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내뱉고 자리를 박차고 나왔다. 그걸로 끝이었다. 그날 이후 조선신민당에 다시는 발을 들여놓지 않았으며 공산당과는 단호히 관계를 끊었다.

지금까지 내가 지녔던 공산당에 대한 막연한 환상이 여지없이 깨져 버렸다.

당시 어수선한 상황에서 김대중이 신민당의 실체를 모르고 입당해서 활동했던것은 이해가 간다.

허나 환상이 깨졌다고 했으나  김대중이 공산당에 대해 어느정도 환상이 있었다는것은 사실이다.

 

신민당을 떠난 이후의 김대중

우익 진영에 참여했지만 이름만 올려놓았을 뿐, 깊숙히 관여하지는 않았다.

이무렵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라는 요구를 받았지만 가입하지 국민보도연맹은 좌익 운동을 하다 전향한 사람들로 조직된 반공단체 였다. 당시 대부분의 기어빈들이 후원회에 참여하여 재정적 지원을 했다. 나도 기업인으로 참여했을 뿐이다.

 

자서전의 김대중 대통령의 유년기와 청년기 시절은 자서전 총2권중 1권(p675)의 69페지에 달하는 짧다면 짧은 내용이었지만 유년시절 김대중이라는 사람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왔고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왔는지 알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펼쳤던 정책들과 그의 가치관은 나와 다르지만 자서전을 통해 그의 가치관을 조금이나마 이해 할 수 있었고, 어린시절의 김대중과 그 가족의 세세한 삶들을 접할때면 매우 흥미로웠다.

자서전은 두꺼운 두깨로 총 두권이지만 끝까지 한번 읽어 보아야겠다.

관련글 더보기